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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with Ha Seong-nan: Looking Behind the Closed Door

by Yoon Chi Kyu Translated by Janet Hong September 5, 2023

Ha Seong-nan

Ha Seong-nan made her literary debut in 1996 when her short story “Grass” won the Seoul Shinmun New Writer’s Contest. Her works include the short story collections Rubin’s Vase, Flowers of Mold, Bluebeard’s First Wife, Wafers, and The Taste of Summer, the novels The Joy of Eating, A, and A Christmas Carol, and essay collections Hope, That Beautiful Strength (co-authored), and Things Still Excite Me.

닫힌 문 너머를 보는 사람: 하성란 작가와의 인터뷰

 

최근 K-POP 걸그룹 르세라핌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라는 곡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금기를 어긴 여성이라는 주제로 이브와 프시케, 그리고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을 연 푸른 수염의 아내 서사를 주된 콘셉트로 삼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도 한국에서 2021년에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다시 뜨겁게 재조명되었는데요. 작가님께서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를 처음 쓰실 때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궁금합니다.

 

프랑스 전래동화인 푸른수염은 한글을 떼고 접한 동화 중 하나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책에는 펜으로 그린 삽화가 실려 있었는데 바로 클라이맥스 부분이었어요. 그녀는 성 꼭대기에서 자신을 구해 줄 오빠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푸른수염은 이제 막 그녀에게로 손을 내뻗을 참이었지요. 그 긴박감이 좋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를 구해 줄 이들이 오빠들라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제게는 오빠들이 없었으니까요. 앤절라 카터도 그랬던 듯합니다. 푸른수염을 소재로 한 소설 피로 물든 방에서는 어머니가 그 역할을 합니다. 푸른수염은 자신의 아내들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면서도 성안의 단 한 방은 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곳엔 전처들의 시신이 있고,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아내들을 그렇게 했지요. 그렇다면 애당초 아무것도 없던 빈방, 그 방을 열지 않아도 되었던 푸른수염의 첫 번째 아내는 무엇 때문에 죽었느냐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지요. 그것이 이야기란 무엇일까, 이야기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고요.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의 개정판을 내기 위해 작품을 다시 고치면서 특별히 유의하신 점이 있을까요?


남편 제이슨이라는 인물을 그려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비밀스러운 인물이라는 설정에 몰두하느라 섬세하게 그 인물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보다 그것을 갈등으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결국 편견과 혐오가 그대로 남고 말았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소설을 쓰던 때로부터 30년이 흘렀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얼마 전 대구시장은 오래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던 퀴어축제를 불법 도로 점거라는 이유로 반대했고, 충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개정판을 낼 기회가 주어졌고, 새로 쓰지는 못한다는 전제하에 미진하지만 그동안의 변화를 소설 속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초판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도대체 나는 무슨 잘못을 했을까로 끝이 납니다.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결국은 개인의 불행을 탓하게 됩니다. 개정판에서 마지막 문장은 도대체 어디에서 잘못된 것일까로 바꾸었습니다. 그 일에 내가 할 일이 있었으리라는 것, 이 불행한 이야기의 반복을 끝낼 수 있었으리라는 것, 이해와 연대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담고 싶었습니다.

 



작품집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속에는 19996월 벌어진 씨랜드 화재 참사와 관련된 단편소설 별 모양의 얼룩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사회적 참사 속에서 피해 유족과 제삼자의 입장을 날카롭게 교차시키며 독자에게 커다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이런 참극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데요. 사회적 참사와 관련된 소재를 소설로 다룰 때 작가님께서 특별히 유의하시는 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거대한 비극 앞에서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소설을 쓰는 동안 씨랜드 참사로 쌍둥이를 잃은 아버지의 인터뷰를 떠올렸습니다.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이가 죽은 것은 다릅니다라고 말할 때의 표정도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씨랜드 참사로 숨진 아이들은 저의 큰애와 동갑으로 올해 서른 살이 되었습니다. 참사로 모든 유치원의 수학여행 일정은 전면 취소되었지요. 우리 아이를 비켜간 일이라고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생각하는 것은 실제와 다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하는 일, 그러면서 기억하는 일. 그 뒤로도 참사가 이어졌습니다. 배가 가라앉고 있는 정지된 화면을 보면서 저는 제가 열심히 해온 일로 그 배를 들어 올릴 힘이 없다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고 좌절했습니다. 1029일 이태원에 놀러 갔던 많은 이들이 귀가하지 못했습니다. 그 골목은 제가 스무 살 때부터 다니던 제게도 익숙한 곳입니다. 그 시간 제가 혹은 제 아이가 그 골목을 지나갔을 수 있었습니다. 생사를 운에 맡겨야 하는 사회를 더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 두려움을 소설로 씁니다. 소설을 쓰는 일로 아무도 구조할 수 없던 그날의 그 무력감을 이겨내고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잊지 않을 테니까요.

 



올해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작가님의 작품 곰팡이꽃을 원작으로 한 영화 <너를 줍다>2개 부문에서 수상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곰팡이꽃은 타인이 버린 쓰레기통을 뒤지는 어떤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요. 이런 특별한 이야기를 처음 구상하시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곰팡이꽃이 여전히 사랑받고 다른 장르로 재창작되며 유의미하게 재해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심혜정 감독님께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김재경 씨의 인상적인 연기에 놀랐습니다. 소설에서 다룬 쓰레기가 영상에서는 어떻게 다르게 표현되었는지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곰팡이꽃을 썼던 25년 전과 달리 이 소설의 어떤 부분은 스토킹으로 읽힐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소통을 향한 욕망이 소설이라는 장르를 염두에 둔다고 해도 과하다 생각되는 부분이 있죠. 다시 읽을 기회가 있어 찬찬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도 놀랐습니다. 그때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고 감각하지 못했지요. , ‘감각입니다. 소설을 쓰면서 전혀 걸리지 않았습니다. 저야 당연히 제 소설 속 인물의 선의를 의심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게까지 해서 타인의 마음을 알아야 하느냐는 질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변명이라면, 지금의 분위기와 많이 달랐습니다.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정작 곁의 사람과도 소통하기 어려운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저는 그런 욕망을 소설로 표현하고 싶었고 제 쓰레기를 뒤지는 일부터 했습니다. 뭉개지고 썩고 있고 찢어진 것들, 거기 제가 모르는 제가 있었습니다. 그때이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지금의 제 감각이라면 이야기의 시작도 전개도 달라졌을 겁니다.

심혜정 감독님은 지금의 이 감각으로 이 소재를 다루려 노력하셨습니다.

 



곰팡이꽃2019년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 시장에서 선보인 후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작가님의 세 번째 작품집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의 번역본이 미국 출판 전문 잡지 퍼블리셔스 위클리에서 선정한 올해 최고의 책 10에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미국 시장에서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K-문학이 이렇게 주목받는 것과 작가님의 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낯선 세계의 독자와 마주하게 된 소회가 궁금합니다.

 

그 부분은 실감이 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미국 영화의 주인공이 한국 컵라면에 물을 부어 먹는 장면을 보았는데, 그렇게 한국 작가의 소설을 익숙하게 읽을 날이 오겠지요.

     제일 먼저 소설을 번역한 재닛 홍(Janet Hong)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맨 처음 제 단편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고, 그것을 번역하고 출간을 알아보려 애써 온 긴 시간이요. 그가 아니었다면 제 소설은 번역되지 못했을 테니까요.

     오래전 미국의 출판 환경은 지금과 달라 비합리적인 출간 조건을 제시하는 곳이 많았고, 우리는 자존심이 상해 적당한 곳을 찾느라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는 적당히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재닛은 자신이 열심히 일한 결과물을 두 손으로 받아보는 데 십수 년이 걸렸습니다. 그 앞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더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한국문학을 알리려 노력해 온 번역가들이 있었고요. 감사드립니다.

 



한때 한국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 이유로 한국어의 특수성이 거론된 적이 있습니다. 한국어가 너무 섬세해서 영어로 번역하기 어렵다는 이유였는데요. 하지만 한국 작가 중에서도 가장 섬세하고 정교한 언어를 쓰는 작가님의 작품이 미국 시장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다른 국면으로 들어섰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설 창작과는 또 다른 번역가와의 작업은 어떠셨는지, 작품이 다른 언어로 번역될 때 작가님께서 특별히 신경 쓰시는 부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작가님도 아시겠지만 책은 작가 혼자만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많은 분의 조력이 필요하지요. 한국에서는 편집자의 힘이 큽니다. 지금은 영향력이 더 커졌고요. 해외에서 다른 언어로 책이 출판되는 데는 번역가의 역할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닛 홍의 재치와 재능이 영문판 소설 속에 얼마나 숨어 있는지 빈약한 영어 실력의 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재닛은 번역가이면서 소설가입니다. 소설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에 알맞은 단어를 선택해서 다시 썼지요. 그 과정에서 제가 한 일은 거의 없었어요. 재닛의 한국어는 능숙하고 아주 가끔 도구의 크기나 모양의 세부 사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에요. 어떤 도구였는지 알아야 그에 맞는 동사를 선택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아,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의 짧은 글을 다른 번역가가 번역한 적이 있는데, 물론 좋은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글이 재닛의 글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냥 알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의 초기작에 관한 평가를 살펴보면 섬세하고 탁월한 묘사를 하나의 특징으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시간이 완전히 정지된 듯한 상태에서 인물과 장면을 세밀하게 그려나가는 집요하고도 끈기 있는 시선이 독자를 매료하는데요. 작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묘사는 소설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지독한 근시였습니다. 안경을 써야 했지만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말을 하지 않은 까닭도 있고, 또 안경잡이라는 놀림이 싫어 오랫동안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로 지냈습니다. 보기 위해 양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고 어떤 형상인지 알아채기 위해 오래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이 습관이 제 소설이 근시안적이라는 단점으로 남았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습관 때문에 본다는 것에 훨씬 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선을 떼지 않는 것은 눈을 감는 일보다 더 적극적인 행위이니까요.

     오규원 선생님으로부터 시를 배우면서 본다는 것이 단순히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의 묘사를 소설에 적용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인물의 내면 묘사를 되도록 아끼고 주변 사물을 통해 대신 말하게 하는 방법도 선생님의 시로부터 배웠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지만 묘사를 통한 디테일한 장면과 상황은 매번 새로움을 주고 몰입감을 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네 번째 작품집 웨하스에 실린 강의 백일몽무역회사에 다니던 여성의 과거와 현재 시간을 모호하게 교차시키는데요. 이 작품이 작가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소설을 다 써놓고도 제목을 달지 못해 오래 고민한 소설입니다. 문득 로르카의 시 제목인 강의 백일몽이 떠올랐고, 망설이지 않았지요. 어느 날 한 여자가 떠올랐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 시간을 감내한 한 여자에 대해 써보고 싶었습니다. 뭔가 후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모습의 여자요. 그때는 짐작만 했을 뿐인 마지막 장면을 지금은 좀 알 것만 같습니다. 로르카는 시 속에서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인가!)’, (얼마나 슬프고 짧은 시간인가!)라고 속삭이듯 말하고 있습니다. 괄호 때문에 더욱 비밀스럽게 느껴집니다. 소설을 쓴 사람이 자신이 쓴 소설처럼 된 것인지 아니면 지금에야 그 인물의 심정에 제 마음이 닿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답고 슬프고 짧은 시간이 흘렀고 짐작했던 그 상황을 지금은 아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소설과 함께 그 시간을 지나왔다는 기분이 듭니다.

 



강의 백일몽에서 주인공 여성은 죽어가는 개에게 손목을 물린 적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훗날 주인공 여성이 노상강도를 만났을 때 피하지 않고 달려들어 있는 힘껏 손목을 물어뜯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강도에게 얻어맞아 만신창이가 된 주인공 여성에게 주변 사람들은 그냥 강도에게 가방을 줘버리지 그랬느냐면서 책망합니다. 하지만 여자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작가님의 작품 속 여성 캐릭터는 모두 매력이 넘치는데요. 지금까지 작가님의 작품 속 여성이 어떻게 존재하고 변해 왔는지,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 문장에 쓰신 것처럼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작가님의 질문에야 제가 평소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릴 적부터 제가 본 여성들은 모두 억척스럽게 일하고 있었습니다. 치장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그렇다면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왜 저는 여자가 가장 아름다울 때다라고 썼던 것일까요.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던 때인 것은 아닐까, 그때를 아름다운 때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있었으니까요.

     저는 여성으로서 여러 가지 제약 속에 있었습니다. 통금 시간은 물론이고 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들 없는 집의 맏이였기에 어머니에게 의지가 되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부재 중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훈련된 여성이 보여주는 조신한 모습과 함께 필요할 때는 어머니 앞에 나서야 했던 또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나를 구하러 와줄 오빠들이 없다면, 아이들을 기르면서 이를 악물고 일해야 하는 어머니를 생각한다면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속 인물처럼 자신이 자신을 구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제 소설 속 여성 인물들에게 조금 다른 개성이 있다면 아마도 그런 시절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만든 인물 속에 평소의 자신이 이루지 못하는 바람들을 담아내기도 하니까요.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일, 그런 일을 할 때 이야기는 시작되니까요.

 



한 문학평론가는 작가님의 작품이 모래알 속에서 우주를 캐내는 특별한 마법을 부린다고 평가했습니다.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20년이 넘는 시간의 흐름을 낮꿈처럼 펼쳐 보인다거나 일상의 아주 사소한 순간을 포착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내면의 진심과 진실을 마주하기 때문인데요. 작가님께서 소설의 소재와 주제를 찾고 고민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도 정홍수 평론가의 표현을 좋아합니다. 소설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이 말을 되뇌이면서 되레 응원을 받고는 합니다. 혼자 지내야 했던 팬데믹의 시간이 끝났지만 그 시간을 통해 저는 제가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가족 외에 누구와도 전화를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은 채 지낼 때가 많습니다. 팬데믹 전 직장에 오가면서 사람들을 만날 일이 많았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러 식당 의자에 앉게 되면 옆 탁자에 앉은 이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기도 했지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분들의 이야기를 소설의 소재로 생각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은 집에서 근무하기에 이런 기회도 더 줄고 말았습니다. 10대인 남자애가 욕설을 내뱉으면서 귀가하기까지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을 좋아합니다. 동료 작가의 소설을 읽습니다. 새로운 소설을 쓰게 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오르면 오래오래 그 사람을 생각합니다.

 



다섯 번째 소설집 여름의 맛에서 작가님은 여전히 인물과 사건을 집요하게 붙들며 이면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하지만, 묘하게 그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물들을 향한 어떤 연민과 연대 같은 것이 생겼다고 할까요? 여름의 맛에서 주인공은 금각사를 잘못 발음해 은각사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낯선 남자의 호의를 받아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복숭아를 먹게 되는데요. 이 사건은 주인공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 어떤 순간마다 떠오르게 됩니다. 이 작품을 쓸 때 어떤 생각을 하셨고, 과거의 작품들과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 궁금합니다.

 

끝이 난 곳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오래전 타국의 역에서 마주친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막 기차에서 내린 참이었지요. 기차 안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고, 그 눈빛에서 누군가에 대한 호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차는 곧 출발했고 그의 모습도 사라졌지요. 그 두 사람은 영영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작되었지만 어긋나고 말았지요. 그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커가는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개에 물리고 사람을 물지만 저도 가끔은 이런 낭만적인 생각을 합니다. 결국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마무리되고 또다시 개에 물리고 무는 이야기를 찾게 되지만요.

 



(추가질문) 다섯 번째 소설집 여름의 맛에 실린 작가의 말을 읽으면 이제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도 될 거라는, 지금까지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생각을 했다.” 라고 적혀 있는데요. 저는 이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더욱 해당 작품집에 실린 소설들을 좋아하게 되었고요. 개인적으로 작가님께서는 10편의 단편소설 중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하시나요? 그리고 작가님이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원주의 한 대학 기숙사에서 몇 번의 여름을 보냈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돌아간 기숙사는 적막해서 무섭기까지 합니다. 그러다 여름 계절학기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왁자지껄해졌어요. 제가 머문 기숙사 방의 창에 서면 저 멀리 저수지가 보였어요. 가보고 싶었지만 낯선 곳이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산책길에 용기를 내어 그 저수지까지 가보았습니다. 저 멀리 제가 머무는 방의 창이 아주 작게 보였어요. 비가 내려 저수지의 수위가 올랐고, 거친 소리를 내면서 물이 둑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구조물에 의해 만들어진 그 물결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날 아침 인적이 없는 그곳에 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그 광경은 만나지 못했겠지요. 앞으로도 설레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조금 흥분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든 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고요. ‘작가의 말에 그때의 그 흥분이 그대로 들어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작가님께서도 아시듯이 하루에도 여러 번 마음이 변하니까요. 어떤 이야기도 쉽게 씌어질 수 없고요. 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이야기 앞에 옴츠러들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쓰게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순천에 나이키 사거리가 있다는 것을 우연히 길찾기에서 보고 순천엔 왜 간 걸까, 그녀는이라는 단편이 떠올랐던 것처럼요. 그때그때 수시로 마음이 가닿고 마음이 바뀔 테니까요, 그 변심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작가님께서는 데뷔하신 지 27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며 창작에 매진하고 계신데요. 앞으로는 소설 속에서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싶으신지요? 많은 독자가 기다리고 있을 여섯 번째 작품에 대한 계획이 궁금합니다. 국내외 독자에게 작가 하성란은 어떤 소설가로 기억될까요?


얼마 전부터 틈틈이 필립 로스의 왜 쓰는가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책 뒤표지에 적힌 온 생이 문학 그 자체였던 필립 로스라는 문구에 탄성이 나왔습니다. 나도 오로지 그런 삶을 바란 적이 있었지 하는 생각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때에 저는 육아로 힘들었고, 잠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도 늘 소설이 쓰고 싶었습니다. 소설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깨동무에서 읽은 동시를 따라 쓰기 시작한 때로부터 자의든 타의든 글을 써왔습니다. 일기를 쓸 시간에 소설을 끼적였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는 소설부터 차근차근 마무리하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계 앞에서 머뭇거리지만 쓸 수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쓰기 전에 보는 사람이고 눈을 감고 싶은 순간에도 눈을 뜨고 보겠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본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을 보고 쓰겠습니다. 그것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끝까지 소설을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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